단풍 유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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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늦은 아침을 먹고,

산에라도 가라고 채근하는 아내의 성화에  슬금슬금 짐을 챙겼다.

마침 양수역에서 약속이 있다는 아내를 차로 데려다주고

간 곳은 운길산역에서 한참을 들어가야 나오는 계곡이다.

너덜지대 밑으로 졸졸졸 물이 흐르는 수준이어서

계곡이라 부르기엔 어정쩡하지만 마땅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좀처럼 산을 오르겠다는 의욕이 나지 않아

차라리 한갓진 계곡에 들어가 단풍사진이나 찍어 댈 생각이었다.

이곳은 언제 와 보아도 신비로운 기운이 돈다.

온갖 봄꽃들이 만발 할 땐 수많은 진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지만,

한 때 뿐이고 사람들의 이목을 잘 받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역시나 이 곳을 오르내리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어,

방해 받지 않고 느긋하게 단풍을 즐기며 사진 찍기에 열중했다.

한참을 오르다 허기가 느껴져 자리를 잡고 조촐한 점심을 시작했다.

김밥 한 줄, 덤으로 따라온 단무지 두쪽, 막걸리 한병이 전부인 식사지만

바람소리, 새소리와 함께 즐기는 점심은 나름 운치가 있다.  
 
친구에게 얻은 중국산 의자가 내 엉덩이 두쪽을 받치기에는

역부족이어서 약간의 불편함을 주었다.

하지만 산에서 이 정도의 안락함이면 됐다.

그래도 내 몸무게를 힘겨워하는 의자 다리가 불쌍해서라도

튼튼한 놈으로 하나 장만 해야겠다. 
 
이 계곡 방문도 올해엔 마지막이지 싶다.
봄부터 벌써 대여섯번을 찾아 왔지만

그 때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이곳에 웬지 애착이 간다.

친한 친구에게 선물로 보여주고 싶은 곳 같은 느낌이다. 
 
 
봄이 되면
아직 녹지 않은 얼음을 뚫고
앉은부채, 복수초, 노루귀가 고개를 내밀고,
뒤이어 얼레지가 땅을 뒤덮고,
괭이눈이 돌틈을 메운다.
바람꽃이 봄바람을 불러들이고,
현호색이 군데군데 모여 종알 거리며,
피나물이 눈부신 노란색의 진수를 보여 준다.
이제 끝났나 싶으면
으름덩굴이 줄기마다 한웅큼씩 암수 꽃들을 피워내고,
고고한 자태의 앵초가 꽃대를 세운다. 
 
바위 밑으로 물이 흐르고
나무들이 초록색 이끼 양말을 신고 사는 그곳,
덩굴들이 얽히고 설키고
썩은 나무 둥치 밑에서
새싹이 돋는 그곳의 잔상이 머리 속에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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